이야기

대한민국의 세사람

드래곤21c 2012. 2. 26. 07:46

 

★국사 (國祀)★

 

이동국

 

1979년 4월 29일 경북 포항 출생

 

 

1998년 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전에서 3:0으로 뒤지고 있던 당시 후반 32분에 투입되어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며 인상깊은 중거리슛으로 성공적인 월드컵 무대의 데뷔전을 치렀다.

비록 대한민국은 5:0으로 네덜란드에게 패하였지만 이동국의 가공할 잠재력을 알리는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이동국의 존재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 한국 축구가 2002, 2006, 2010 월드컵 본선에 연이어 진출할 때

아웃사이더로 전락했고 단 한번도 실력에 걸맞은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감독들의 외면, 부상 악연 때문이었다.

 

히딩크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2002 한·일월드컵 때 이동국은 떠오르던 신예 차두리에게

밀려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고, 먼발치에서 4강 신화를 지켜봐야 했다.

탁월한 골감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체력과 멀티플레이어로서의 능력을 중시하던 히딩크 감독은 그를 외면했다.

 

이동국은 네덜란드 출신 딕 아드보카트가 사령탑을 맡은 2006 독일월드컵 대표팀에서

부활했지만 본선을 코앞에 두고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으로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허정무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2010 남아공월드컵 때는 최종 엔트리에 들었으나

박주영·이청용 등에게 밀려 벤치신세를 져야 했다.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는 0-1로 뒤지고 있던 후반 16분 김재성 대신 투입돼 반전의 기회를 잡기도 했다.

 

그러나 막판 박지성의 절묘한 패스를 받은 뒤 벌칙구역 오른쪽에서 골키퍼와

단독으로 맞서는 기회를 맞았지만 부정확한 슈팅으로 땅을 쳐야 했다.

이 사건으로 이동국은 생애 최악의 악플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 모든 역경과 고난을 묵묵하게 이겨낸 이동국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최강희 감독을 부름을 받아 다시금 월드컵에서의 명예회복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월드컵과의 악연을 끊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 진출해 멋진 경기내용을 선사해준다면

이동국의 시련과 고난은 각본없는 인생의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감동을 전해줄 것이다.

 

그가 다시 한번 날아 오르길 기대해 본다.

 

 

 

 

 

 

 

 

 

 

 

 

 

 

 

 

 

 

 

 

 

 

 

 

 

★성인군자 (聖人君子)★

 

최민수

 

1962년 3월 26일 서울 출생

 

 

 

사실 최민수만큼 마음이 여리고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도 없을 것이다.

그는 항상 영화, 드라마 속 캐릭터의 이미지 때문에 수없는 루머와 악플에 시달려야 했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유노인 사건이다.

 

 

 

2008년 4월, 최민수씨와 유씨 노인이 시비가 붙어 벌어진 일을 언론에서 없는 사실까지

꾸며내 일방적인 폭행으로 과대포장하고 보도하여 물의를 빚은 사건이다.

 

그러나 결국 이 사건은 무혐의 처리되며 신나게 까대던 언론들은 나몰라라 입씻고

또한 온갖 욕도 서슴지 않았던 악플러들도 모두 버로우 타면서 사건이 종료되었다.

 

당시 최민수는 그 누구도 탓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덕이 부족하여 이런 일이 생겼다고 말하였다.

 

 

 

 

 

① 피해자로 나오는 유씨 노인은 지방의 유지다.

빌딩도 몇 채 있고 고깃집도 운영하는 등 재정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당시 저 유씨 노인의 가게에서 지정한 주차장이라는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의

불법주차로 인해 신고가 몇차례 들어왔고 구청측에서 견인을 위해 단속 차량을 보냈다.

 

 

 

 

주차장 관리직원들이 도로를 막고 한바탕 소동을 부리는 바람에 교통정체가 발생하고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최민수씨가 보다 못해 직원들을 물러서게하고 차량을 견인시키게 도와줬다.

 

 

 

 

유씨 노인측과 최민수씨 간에 시비가 붙었지만 언론에서 주장하는 폭행사건은 없었고

단지 주차장안까지 들어가서 유씨노인과 최민수씨가 심한 말다툼끝에 멱살잡이를 했고

그 와중에 유씨노인을 소파에 앉히자 주변에서 말렸고 유씨노인은 부리나케 경찰서에 신고했다.

결국 관할 지구대까지 가서 이야기가 오간 끝에 최민수씨가 사과하는 선에서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다.

현재 밝혀진 진실로는 최민수씨의 노인폭행 사건은 여기가 끝이다.

 

 

 

 

유씨 노인이 다음날 전치 2주짜리 진단서를 끊고 경찰서를 찾아가 고소하고 이것을 기사화 시켰다.

 

 

 

 

단 몇시간만에 하이에나 마냥 냄새를 맡고 몰려든 기자들이 앞다투어 선정성있는

언론보도를 내놓기 시작했고 유씨 노인의 "폭넓은 인맥과 목격자"들의 입방정이 맞물려

최민수씨와 유씨 노인간의 단순한 시비사건은 순식간에 주먹폭행으로

그리고 흉기난동으로 그와 더불어 차량납치 사건으로 변질되었다.

 

 

 

 

⑥ 24시간도 안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고 언론사들은 사실 관계여부 따위는

관심도 없이 일단 뉴스거리부터 만드는게 목적이었기에 소문을 마구 물었고

이런 언론습성을 이용한 유씨 노인이 지방의 인맥을 동원해 거짓진술을 하게 하고 거짓목격자를 만들었다.

최민수씨는 삽시간에 노인을 무고하게 폭행한 개념없는 공인으로 몰렸고

직접 본인이 사죄하는 상황에서도 네티즌들의 악플은 계속 되었다.

 

 

 

 

⑦ 이후 경찰의 수사와 CCTV 증거 영상, 추가적인 현장 목격자들의 확보에 따라

최민수씨의 폭행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가장 큰 논란이었던 흉기협박은

피해 당사자인 유씨 노인이 사건이 불거지자 자기는 기억이 안난다며 진술번복을 하여

결국 최민수씨는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처분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최민수씨의 사건이 유씨 노인에 의해 공론화될 때는 온갖 과장기사를 내놓았던

언론들이 최민수씨가 무혐의 처분을 받을 땐 단 한줄짜리 기사조차 내놓지 않았고

이러한 기사들을 본 네티즌들의 입소문 효과 때문에 최민수씨의 이미지는 일부 사람들에게

아직도 "노인을 폭행하고 흉기로 협박하여 차에 매달고 도주한 정신병자"로 남아있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고 속속들이 밝혀진 사실들이 알려졌으며

최민수씨 사건을 재조명한 다큐도 방영되었다.

 

 

 

 

 

 

 

 

 

 

 

 

 

 

 

 

 

 

★부처님★

 

문희준

 

1978년 3월 14일 서울 출생

 

"문보살" 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문희준은 살아있는 부처다.

 

안티 = 문희준

 

안티는 곧 문희준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는 심각한 시절을 보냈다.

 

 

 

사실 문희준이 욕먹을 만한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음악이 좀 아니긴 했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락음악을 하고 싶었고

찌라시 뉴스에서 나온대로 7옥타브가 가능하다는 둥 레드제플린을 넘어선다는 둥

이 모든 것은 루머로 드러난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

 

오이 3개를 먹으며 배고픈 락커 생활을 한다고 말한건 사실이다.

 

이 때문에 루머 + 오이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며 안티 곱하기 안티를 양성해냈다.

한마디로 걸어다니는 안티 양성소였다.

 

여기에 핵폭발에 버금가는 오인용의 무뇌중 캐릭터로 인해 문희준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문보살은 그 어떤 시련속에서도 울지 않았고 무릎팍도사에서 밝혔다시피

자신을 믿어주는 팬, 아버지, 가족들을 의지하며 군생활도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

 

군생활을 마친 후 좀처럼 미동이 없고 부처님같은 자비로운 인상을 보이자

그를 두드리던 수많은 언론과 악플러들은 하나 둘 그에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문희준, 그는 마치 살아 돌아온 성인...   간디, 잔다르크, 석가모니가 환생한 현세의 미륵부처와도 같았다.

 

대한민국 역사에 이런 미륵부처가 다시 탄생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그의 매니저와 측근들은 루머를 퍼뜨린 사람들과 오인용을 법적고소하기로 하였으나

우리의 문보살은 그럴 필요 없다며 용서와 관용을 베푼다.

 

문희준, 그는 진정 살아있는 부처라 할 수 있겠다.

 

문희준은 아직까지도 오이를 먹지 못한다고 무릎팍도사에서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