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18세기 조선의 역사

드래곤21c 2012. 10. 5. 16:22


 

 

 

 

 

 

 1720년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왕위에 올랐다.

 

 

 

 

 

 경종은 어머니 장희빈의 가문이 남인 계열이었기 때문에 당시 집권당이던 서인들은 경종의 즉위를 극렬하게 반대했다. 특히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경종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하다가 사약을 먹고 죽었다. 하지만 숙종이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연잉군을 얻고, 숙종이 남인들과 충돌하면서 경종은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서인이 남인들에 대한 강경파인 송시열의 노론과 온건파인 윤증의 소론으로 분당된 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였고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게 되었다.

 숙종은 노론 정치가 이이명을 불러 경종을 세자에서 폐위하고 연잉군을 즉위시켜 달라고 명했다. (1717년의 정유독대, 이 일 때문에 경종이 즉위한 후, 이이명을 비롯한 이건명, 김창집, 조태채 등 노론 4대신과 60여명의 노론의 핵심인물들이 처형당했다.)

 

 하지만 소론의 반발이 강했고, 3년 뒤인 1720년 숙종이 죽었기 때문에 경종은 겨우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소론은 노론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는데 그 와중에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 경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암살당했다는 의견도 있다.  

 

 

 

 

 경종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숙빈 최씨 (mbc 사극 동이의 주인공 동이가 숙빈 최씨다.) 가 낳은 연잉군이 1724년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조선 21대 임금 영조이다.

 

 

영조 젊은 시절 초상화

 

 영조가 즉위하자 사형당한 노론 4대신이 복권되고 노론이 정권을 잡았다. 경종 때 노론측 인사들을 숙청했던 소론은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이 때부터 정국은 살얼음판이 되어 소론의 과격파가 군사를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영조는 군사를 소집해 자신의 호위를 강화하고 군사반란 움직임에 대해 친히 조사에 나섰다.    

 

 

 

 

 다급해진 소론 과격파는 영조와 노론이 경종을 독살해 왕위를 찬탈했으므로 이를 바로잡겠다며 1728년 이인좌를 중심으로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의 난은 소론 과격파와 남인들이 영남을 거점으로 일으킨 반란이었다. 반란군은 청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북상했으나 경기도 안성에서 관군에게 격파됐다. 이인좌는 생포돼 참수됐다. 이인좌의 난으로 영남은 반역향으로 낙인 찍혀 대구 감영 앞에 영남평정비가 세워 졌고, 흥선 대원군이 집권해 경상도를 복권할 때까지 130 여년간 경상도 선비들은 과거를 보지 못하게 했고, 관직을 얻더라도 정5품 이상으로는 승진을 제한해 경상도인들의 정계 진출은 철저히 차단됐다. 영남을 근거지로 하는 남인들은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정계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인좌의 난 진압에는 온건파 소론 인물들도 적극 참여하였으나 이후 노론의 권력장악은 가속화되었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궤멸적 피해를 입었다. 이인좌의 난으로 영조는 소론과 남인들의 잔당을 철저히 탄압했는데 이는 반란세력들이 영조가 숙종의 자식이 아닌 숙빈 최씨가 무수리일 때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어 낳은 자식이라고 주장했고, 이인좌는 직접 국문하는 영조의 앞에서 영조를 결코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영조를 모욕하다가 참살당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평생 이인좌의 난 트라우마에 시달렸는데 결국 이것이 훗날 자신의 자식인 사도세자를 죽이는 비극을 낳게 된다.  

 

 영조는 피비린내를 뒤집어 쓰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상대 당에 대한 숙청이 반복되는 고리를 끊고자 탕평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영조의 왕권 자체가 노론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불완전한 탕평책이었다. 노론이 주도하는 상황에서 소론이 소외받고 있는 한 경종의 독살설과 영조의 출생의 비밀은 언제 터질지 모른는 시한폭탄이었다.

 

 1755년 나주에 조정을 비난하는 괴문서가 벽에 걸리는 나주벽서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종의 독살설과 영조의 출생에 관한 일이 불거져 나왔다. 아킬레스건이 건드려진 영조는 폭발했고, 노론은 이 기회를 틈 타 소론을 완전히 전멸시키려 했다. 형식적 탕평책마저 없애려 한 것이다. 그런데 사도세자는 소론을 완전제거하려는 노론의 뜻에 반발했다. 사도세자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노론은 당황했다. 사도세자는 소론은 물론 남인과 북인들까지 균형을 이루는 완전탕평책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론은 영조가 평생 짊어져야 했던 형을 죽였다는 의혹과 출생 컴플렉스를 자극해 사도세자가 영조를 배반할지도 모른다고 이간질하기 시작했다. 영조는 급기야 사도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령했고, 사도세자가 이를 거부하자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이고 말았다.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극단적인 영조의 행동은 역적으로 몰려 형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위기를 넘기고 왕위에 올라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피비린내 나는 삶을 살아 온 트라우마를 노론이 자극해 폭발시켰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비참하게 죽은 뒤 영조는 뒤늦게 후회하고 노론들의 방해공작을 이겨내고 자신이 죽인 아들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776년 83세가 되던 해 52년간 다스리던 세상을 떠난다.    

 

 사도세자가 죽을 때 정조는 11살이었고, 영조가 죽던 해에는 25세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젊은 왕은 즉위하자 노론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해 노론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정조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세력을 탄압하고, 노론에 협조했던 외할아버지 홍봉안을 도성 밖으로 추방으로 작위를 박탈했다. 그리고 자신의 할아버지인 영조의 묘는 풍수지리와 왕실법도에 따르지 않고 아무렇게나 매장해 버린다. 정조에게는 자신의 어머니, 외가, 할아버지가 모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던 것이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보호해 준 홍국영을 측근으로 삼아 노론을 공격을 방어하며 개혁정치를 펼친다. 규장각을 설치하고,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연암 박지원의 제자들, 그리고 정약용 등 실학사상을 가지고 있던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했다. 채제공을 재상으로 삼아 자유상업정책을 펴고, 한성을 근거지로 하던 노론 기득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수원에 화성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했다.   

 

 정조의 개혁 정치로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는 상황에 놓인 노론은 정조의 차별 없는 인재 등용과 대숙청의 언급에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는 49세가 되던 1800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건강하던 정조는 1800년 6월 10일 종기가 생겼고, 6월 27일 쯤에는 거의 의식을 잃을 정도로 갑자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더니 6월 28일 숨을 거뒀다. 정조의 죽음은 현재도 논란이 되고 있다.       

 

 정조의 죽음은 모든 일의 중지를 의미했다. 정조 사망 후 노론 정권은 정조의 치세를 부정하는 청산작업을 벌였다. 정조가 육성했던 인재들은 모두 축출돼 정약용처럼 귀양살이를 하거나 이가환처럼 처형당했다. 탕평책은 붕괴됐고, 붕당정치는 급기야 서울 중심의 일부 벌열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라는 최악의 형태로 변질됐다. 세계사에서 가장 중용한 시점이라고 생각되는 19세기를 우리나라는 대원군이라는 파괴자가 나타날 때까지 세도정치 속에서 개혁없이 잠든 채 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