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1937년 난징 대학살 (BGM)|

드래곤21c 2014. 6. 15. 17:15

 

이 때의 조선은

약 800만 명의 국민들이 징용, 정신대로 착출되는 본격적인 시기이다.

또한 연해주의 조선인들 18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등 북부 주요도시들을 점령했다.

11월 어렵게 상하이까지 점령하고

 

 곧바로 난징을 향해 진격한다.

 

 

 

 

 

 

 

 

 

 

 

 

난징대학살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간다.

 

 여기서 피난가지도 못한 채 남아있던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 상태속에서 4~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학살을 당한다.

여성들은 어린이는 물론 노인들까지 강간을 당하고나서 학살당했다.'선간후살'(先姦後殺)

 

1937년 12월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동안 15~30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했다.

 

 

 

 

 

 

 

 

 

 

 

 

 

 

 

 

 

 

 

 

 

 

 

 

 

 

이때 발견된 일본군들의 일기를 보면

살인이 일종의 무료함을 달래는 오락처럼 행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100인 목베기 시합이 1937년 한 일본 신문에 보도되고 있다

 

그 당시 일본해군에 의해 미국경비정파나이 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일본정부는 미국과 영국정부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배상금을 지불했다.

 

 

 

 

 

30만의 희생자를 잊지말자고 기념관에 300,000의 숫자가 써있다.

 

 

 

최근 중국은 7만평 규모의 난징 대학살 역사관을 설립하고,

일본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려고 하고 있다.

역사를 중요시하는 중국인은 2012년 4000만자나 되는 78권의 방대한 ‘난징대학살 사료집’을 발간했다.

 

 

 

 

 

중국인들은 과거를 잊지 않는다

중국 시민과 군인 1만명이 난징대학살 70주년에 모여 묵념하고 있다.

 

 

사료집 편찬을 주관한 장셴원(張憲文) 난징대 교수는

 "이번 사료집 발간으로 많은 역사적 사실이 분명해졌다"면서"

올바른 교육으로 중·일 양국 젊은 세대 간 우호적인 관계를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사연구실의 탕중난(湯重男) 교수는

 "사료집 완간의 공은 당대에 있지만, 그 이익은 천추(千秋)에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