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조, 너를 위하여
나의 밤기도는 길고
한가지 말만 되풀이 한다
가만히 눈 뜨는 건
믿을 수 없는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 버리고
못다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김강호, 초생달
그리움 문턱쯤에
고개를
내밀고서
뒤척이는 나를 보자
흠칫 놀라
돌아서네
눈물을 다 쏟아내고
눈썹만 남은
내 사랑
문정희, 기억
한 사람이 떠났는데
서울이 텅 비었다
일시에 세상이 흐린 화면으로 바뀌었다
네가 남긴 것은
어떤 시간에도 녹지 않는
마법의 기억
오늘 그 불꽃으로
내 몸을 태운다
오규원,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이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 말 없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황경신, 청춘
내 잔에 넘쳐 흐르던 시간은
언제나 절망과 비례했지
거짓과 쉽게 사랑에 빠지고
마음은 늘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어
이제 겨우 내 모습이 바로 보이는데
너는 웃으며 안녕이라고 말한다
가려거든 인사도 말고 가야지
잡는다고 잡힐것도 아니면서
슬픔으로 가득찬 이름이라 해도
세월은 너를 추억하고 경배하리니
너는 또 어디로 흘러가서
누구의 눈을 멀게 할 것인가
용혜원, 깊고 깊은 밤에
모든 소리마저 잠들어 버린
깊고 깊은 밤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
잠들지 못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그대 얼굴은 자꾸만
내 가슴 속을 파고든다
그대 생각 하나 하나를
촛불처럼 밝혀 두고 싶다
그대가 멀리 있는 밤은
더 깊고
더 어둡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밤마다 나를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이냐
지금도 사방에서
그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구강본, 귀가
하루가 한 생에 못지 않게 깁니다
오늘 일은 힘에 겨웠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산그림자 소리없이
발 밑을 지우면 하루분의 희망과 안타까움
서로 스며들며 허물어집니다
마음으로 수십 번 세상을 버렸어도
그대가 있어 쓰러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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